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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책

쓸쓸할 때 보면 좋은 영화 - 릴리와 찌르레기

by 7시에 말자씨는 2023.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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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견뎌야 할까? 도망가야 할까? 

 
사람들이 상실의 슬픔을 견디어 내는 방식은 다양하다. 고통을 무릅쓰고 상실을 받아들이며 극복하려는 사람,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함으로써 고통을 유예시키고 회복기간이 길어져 결국 더 큰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 무기력에 빠져 영영 회복하지 못하는 사람.

다음 이미지에서 가져왔어요

영화 릴리와 찌르레기는 사랑하는 아기를 잃고 난 후 상실의 아픔을 다른 방식으로 극복하는 부부의 이야기이다.
 
남편 잭은 아기를 잃은 슬픔과 죄책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하다가 아내 릴리에게 발견되어 정신 병원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도 그는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으며 의사와의 상담에 시큰둥하다. 그저 괜찮다고 말하며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의사가 자신을 내버려 두기만을 바란다. 한마디로 극복해 낼 의지가 없는 것이다.
 
그가 치유 프로그램에서 고백했듯 잭의 깊은 우울은 케이티 (딸)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잭은 20살 때부터 계속 인생의 출구가 어딘지 모를 우울에 시달려 왔다고 말한다. 케이티의 죽음은 어쩌면 그가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우울 속에서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는 명분을 준 것인지도 모른다. 잭은 정신병원에서 나와 일상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다. 초등학교 미술 교사였던 잭은 복직해서 아이들을 볼 때마다 케이티를 지켜내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릴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릴리에게도 과거의 착하고 다정했던 남편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아내 릴리는 표면적으로는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여전히 직장 생활을 하고 화요일마다 정신병원을 찾아 잭의 치유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릴리 또한 전혀 괜찮지가 않다. 직장 동료들도 릴리의 상태가 온전치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며 잭의 정신병원 상담사도 릴리에게 치료가 필요하다는 걸 감지하고 의사를 소개한다.
 
그렇다. 사실은 잭도 릴리도 둘 다 괜찮치가 않다.
 
릴리는 자신의 트라우마는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잭의 회복을 위해서 노력한다. 마치 잭만 일상으로 돌아온다면 두 사람은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막상 괜찮으냐고 묻는 주변인들의 질문에 릴리는 선뜻 답변을 하지 못한다. 서서히 스스로의 트라우마를 자각하고 인정한 릴리는 잭의 상담사가 소개해준 의사를 찾아간다. 과거에는 정신과 의사였으나 지금은 수의사로 일하고 있는 래리는 릴리의 일방적인 방문에 화를 내면서도 그녀가 슬픔을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다. 릴리는 텃밭을 일구는 과정에서 그녀의 마당에 터를 잡은 찌르레기와 갈등한다. 그녀를 공격하는 찌르레기를 제거하려고 애쓰던 릴리는 찌르레기가 그녀의 마당 나무에 새끼를 낳아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미안해하며 찌르레기와 공존할 생각을 한다.
 

슬픔의 세 번째 단계 분노와 협상,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것, 우울

 
릴리는 떠난 아기의 물건들을 처분하고 마당에 채소를 기르면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애쓴다. 하지만 감정은 어떻게든 분출해야만 하고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꾹꾹 눌러놨던 감정이 폭발한 릴리는 찌르레기를 돌로 쳐서 공격하기도 하고 랠리를 찾아가 화를 내기도 한다. 랠리는 슬픔의 세 번째 단계는 분노와 협상이라고 말하며 릴리의 분노가 동물을 공격하는 것으로 분출될 수 도 있다고 한다. 그 세 번째 단계를 넘어가면 무엇이 있느냐고 묻는 릴리에게 래리는 우울이라고 말한다. 과연 릴리는 슬픔의 몇 단계에 있을까? 아마도 릴리는 이미 슬픔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웃고 있는 릴리도, 화내고 있는 릴리도, 넋을 놓고 있는 릴리도 내 눈에는 모두 울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릴리는 “다들 아무 일 없는 듯이 살아가는데 나는 좀 쉬라고 말하고 싶어”라고 혼잣말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작스러운 사고나 범죄자의 손에 잃어버린 사람들은 한동안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 의사 랠리는 “원래 인간이란 게 그래요. 이유 없이 일어나는 비극을 못 받아들여요.”
 
맞다. 그들은 그저 잠시 그 고통 속에서 물러나 있거나 쉼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을 뿐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사람들은 ”저 사람은 어떻게 아내를, 남편을, 자식을 보내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사람들 만나서 웃고 떠들 수가 있는 가? “라고 비난한다.
영화 속 잭 역시 아내 릴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내 아내는요, 놓을 줄을 몰라요. 아내는 그냥 버텨요.. 희망과 믿음으로. 그렇게 꾸역꾸역 살아가는데 그게 미치도록 싫어요. “라고.
 
하지만 애도 반응이라는 것이 항상 고통과 슬픔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애도의 기간에도 휴식은 필요하며 한 발짝 물러서서 쉬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오래오래 애도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치유하고 일상을 회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영화 속 릴리는 잠시 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기에 이어 남편도 자신을 남겨둔 채 세상을 등지려고 했다는 배신감에 떨면서도 그가 치유되기를 바라며 정작 자신의 가슴이 멍들어 가는 걸 모르는 사람이다.
 
나 포함 인간은 상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고통 앞에 서면 내가 가장 힘들다. 그 힘듦을 상대에게 전시하고 위로받으려는 욕망을 누가 더 잘 숨기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영화는 너무 과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아서 좋다.
분노와 슬픔, 우울 같은 감정들이 과잉표현되지 않아서 좋고
멜리사 매카시의 숨길 수 없는 귀여움이 웃음을 자아내게도 한다.
특히 벤자민 웰피시의 피아노와 신시사이저가 어우러진 배경음악은
영화를 보는 내내 나에게도 치유와 평화, 잔잔하고 기분 좋은 우울함을 안겨주었다.
나른한 오후에 혼자 보기에도,
사춘기 딸과 달콤한 디저트를 앞에 놓고 보기에도 좋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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