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영화 줄거리는 스포가 많아서 글 후반부에 썼습니다>
이 영화를 흔히 사회와 격리되어서 살아온 소녀의 성장기라고 소개하곤 한다.
하지만 주인공 카야는 사회에서 격리된 것이 아니다. 단지 마을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모퉁이 습지에서 서식하고 있었을 뿐 그녀가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벗어나 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카야라는 이름대신 슾지 소녀라고 부르면서 그녀의 존재를 하찮게 만드는데 적극적이었다. 카야는 조롱과 멸시, 터무니없는 루머의 촘촘한 혐오의 사회 관계망 속에서 상처입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카야가 어린 시절에 혼자 남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도입부와 외부인으로만 존재하던 카야가 무죄 판결을 받고 성공한 후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게 된 장면을 보여주는 결말 부분은 별다른 설명 없이 빠르고 짧게 전개된다. 하지만 카야의 외롭지만 자유분방한 습지 생활과 로맨스, 자연과의 교류와 관찰이 그녀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과 의미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담고 있다. 사실, 이야기 없이 습지의 풍광과 자연의 일부로서의 카야의 모습만 러닝타임 125분 동안 본다 해도 전혀 지루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화면들이다.
온갖 조류의 비상과 울음소리, 하늘거리는 수초와 늘어진 덩굴 식물들, 바람에 흩날리는 관엽들, 여명의 아지랑이와 한낮의 햇살, 불타오르는 석양 속에서 흔들리는 갈대와 습지의 미로를 유영하는 보트들, 어느 것 하나 글로 표현하기 쉽지 않게 아름답다. 마치 한 편의 시를 영상으로 감상하는 기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상의 호기심은 영화를 직접 보고 해소하기를 바라며 나는 그중 인간, 특히 카야의 네 남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살면서 나도 모르는 나의 재능을 깨우쳐주고 곁에 아무도 없는 순간에 나의 편이 되어 주는 인생의 조력자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하지만 그와 정반대의 사람, 나의 자존감을 훼손하고 나에게 모멸감을 주며 나의 재능을 하찮게 여기고 나를 틀에 가둬놓고 조종하며 유린하려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불행이다.
슬프게도 우리 인생에 전자만 닥치는 것은 아니다.
카야에게도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했는데 테이트와 변호사 톰 밀튼이 전자였다면 아버지와 케이트가 후자이다.
카야의 구원이 된 두 남자, 테이트와 톰 밀튼
테이트(테일러 존 스미스) : 카야의 친구이자 연인이며 남편
‘그 남자애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구석이 있었다.’ ‘엄마와 조디가 떠난 이후 처음으로 아픔이 아닌 감정을 느꼈다. ’
테이트는 카야의 작은 오빠 조디의 친구로 어려서부터 카야 편에 서서 마음을 써주던 사람이다. 어려서 카야가 아버지에게 맞을 때는 몸을 던져 막아 주었고 아버지와 단둘이 남은 카야가 용기를 잃지 않게 격려하고 그녀에게 글을 가르치고 생각을 공유하며 우정과 사랑을 쌓아간 친구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생물학자가 되고 싶은 꿈이 있으므로 습지에서 카야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학에 가기 전 카야의 재능이 세상에 알려지고 그로 인해 살아갈 경제적 동력이 생기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테이트는 카야에게 출판사 목록을 적은 메모를 주고 샘플을 보내보라고 알려준다. 테이트는 한 달 후 독립 기념일에 돌아와 같이 불꽃놀이 구경을 하자고 약속하고 떠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장면이 바로 혼자 불꽃을 바라보며 습지에서 밤을 지새우는 카야의 모습이었다. 비록 공부를 하는 동안 약속을 지키진 못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카야 곁에서 추근대는 체이스 앤드루스로부터 카야를 구하려고 애쓴다. 체이스를 죽인 살인범으로 재판을 받던 카야가 무죄로 풀려나자 그녀와 결혼해서 여생을 같이한다. 카야가 죽고 난 후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카야가 체이스를 살해했다는 결정적 증거를 발견한다.
톰 밀튼 (데이비드 스트라탄) : 카야의 변호를 맡았던 국선 변호사
학교에 가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학교로 가던 어린 카야가 도중에 용기가 나지 않아 돌아갈 때 불러 세워서 학교에 가는 건 권리라고 가르쳐주던 마을의 어른이다. 카야가 타살인지 사고사인지도 확실치 않은 체이스 앤드루스 죽음의 범인으로 몰려 체포되었을 때 그녀의 변호를 자청했다. 카야를 혼자 사는 부도덕한 마녀로, 습지에서 사는 세균덩어리로 치부하며 온갖 소문을 만들어 내고 외부인이라고 배척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들의 편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하고 배심원들을 설득해서 무죄를 받게 한다.나는 영화를 보면서 어쩌면 톰 밀튼은 카야가 진범임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설령 알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똑같이 그녀를 구해줄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 아니 희망사항인가?
카야의 두 포식자 아버지와 체이스 앤드루스
아버지 (가렛 딜라헌트)
‘문제가 생기면 습지 깊숙한 곳,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숨어. 엄마가 항상 그러셨듯.’
카야의 작은 오빠 조디가 떠나면서 카야에게 이른 말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카야의 아버지는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으로 가족을 향한 폭력을 일삼는다. 결국 어린 카야에게서 엄마도 두 오빠도, 두 언니도 모두 떠나게 만든 장본인이다. 카야와 단둘이 남게 되자 카야에게 습지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잠시 가르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아이의 의식주와 교육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통제한다. 카야를 안쓰럽게 여기는 동네 마트의 점핀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람들하고 어울리지 못하게 했네. 위험한 세상 아닌가?” 이 대사에서 보면 딸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카야의 아버지는 자신이야말로 카야에게 포식자 같은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외부에게서 위험 요소를 찾는다. 그리고 세상이 정말 딸에게 위험하다고 느낀다면 그 위험으로부터 딸을 지켜내거나 딸이 세상과 대면해서 생존할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부모 아닌가?
어린 딸이 아빠에게 “나 배고파“라고 하는 것이 용기를 내야만 할 수 있는 말이라면 그것은 이미 부모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경제적 무능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장벽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언제 폭력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아빠에게 느끼는 공포감에 떠는 자녀들의 정신세계가 온전할 리 없다.
체이스 앤드루스 (헤리스 디킨슨)
‘혼자 사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두려움에 떨며 산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
체이스 앤드루스 역시 카야에겐 포식자이다. 그는 카야와 단 둘이 있을 땐 추앙의 언사를 늘어놓고 그녀의 애정을 구걸하지만 타인 앞에서는 외면하고 그녀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무리에 동조한다.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습지로 카야를 찾아다니며 가스라이팅을 일삼고 욕망을 채우려는 개새끼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놈들의 특징은 상대에게 욕망을 사랑이라고 포장하고 집요하게 애정을 구걸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포식자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그 사실은 카야의 독백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빠로부터 배운 것은 단 하나, 이런 놈들은 포기를 모른다는 것이다. 혼자 사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두려움에 떨며 산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이미 이 독백에서 많은 관객들은 체이스 앤드루스를 죽인 진범은 카야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카야가 습지에 혼자 사는 여자란 이유만으로 체이스 앤드루스를 죽일 만큼‘인격적 결함'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카야 스스로는 ‘약자가 살아남는 방법은 포식자를 죽이는 것이다. 자연 속에는 그것이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말한다.
매일매일 포식자들의 뉴스를 접하면서 생각이 많아지는 메시지이다.
영화 줄거리
1969년, 노스 캐롤라이나의 버클리 코브의 습지에서 한 남자의 시신이 발견된다.
이름은 체이스 앤드루스. 그를 죽인 살해범으로 카야 (데이지 에드거존스)가 지목되고 그녀는 체포된다. 국선 변호사 톰 밀튼이 그녀의 변호를 맡게 되면서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카야가 아주 어렸을 때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참지 못해서 엄마, 큰 오빠, 두 언니가 떠나고 작은 오빠마저 떠나버린다. 아빠와 단 둘이 남게 된 카야에게 아버지는 잠시 생존법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이윽고 그 마저도 카야만 남겨놓고 떠나버린다. 홀로 남겨진 카야는 홍합을 따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습지의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습지에 서식하는 조류와 식물들을 관찰하여 그림으로 그린다. 마을에서 작은 오빠 친구인 테이트와 마트의 흑인 부부, 그리고 변호사 톰 밀튼만이 그녀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믿고 의지하던 친구이자 연인인 테이트마저도 대학에 가기 위해서 그녀 곁을 떠난다.
모두가 떠나버린 상실감에 카야는 새로 다가온 남자 체이스 앤드루스와 가까워지지만 그가 죽게 되고 카야는 그를 죽인 살해범으로 체포된다. 경찰은 그가 살해되었는지 단순한 낙상 사고인지도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녀 사냥하듯 카야를 체포해서 재판에 회부한다. 어려서부터 카야를 보아온 변호사 톰 밀튼이 최선을 다해 무죄 판결을 받아내고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테이트와 여생을 살게 된다. 카야가 죽고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던 테이트는 그녀의 일기장 속에서 케이트를 카야가 살해했다는 증거를 발견한다.
어느덧 주말도 다 갔다.
평온한 주말 저녁을 마무리하기에 좋은 영화이다.
'영화&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81일간의 공포를 뚫고 나오다. '트리 어브 피스' - 넷플릭스 영화 (0) | 2023.03.13 |
---|---|
Strays - 자기 부정의 무한 루프 (0) | 2023.03.03 |
Lucy -당신은 몇 %의 뇌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0) | 2022.12.31 |
천번의 굿나잇(A Thousand Times Goodnight) (0) | 2022.12.28 |
ㅡ무엇이 우리를 쓸모없이 만드는가 (2) | 2022.12.24 |
댓글